vendredi 26 octobre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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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수평-수직 체계 위에서의 사유

, Suh Young-Hee

서영희 (홍익대학 미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
SUH Young-Hee (Professor at Hong-Ik University, Art critic)

수평과 수직, 구조, 상징

수평선과 수직선이 서로 만나면 십자형이 된다. 이 두 선들은 종횡으로 엇갈려 십자형을 구성함으로서 서로에게 없어서 안 되는 상호 보족의 관계를 이루고 균형을 잡는다. 설혹 수평선과 수직선이 떨어져 있더라도, 우리는 이 둘을 잇는 십자형을 쉽게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일찍이 원시문화나 고대문화에서도 수평선과 수직선을 반복하거나 위치를 조정함으로서 셈을 세는 기호 혹은 메시지를 전하는 상징기호 나아가 문자로 사용했다. 특히 이 두 선들이 중앙에서 직각으로 마주친 십자형은 동일한 길이의 두 수평선과 두 수직선이 네 개의 직각을 이룬 정사각형보다 중앙집중의 힘이 강하다 하여 한층 더 완벽한 기호로 여겼다고 한다. 심지어 ┼형 구조가 기울어져 ╳형 구조로 되어도 균형과 완성을 상징하는 완벽한 기호로 본다. 그래서 고대 라틴인은 마지막 숫자 아홉 다음에 완성을 뜻하는 숫자로 ╳형을, 고대 중국인도 열 십자를 ┼형으로 그렸다. 또한 세상의 척도로서 인체도 십자형이다. 인체는 사지와 장기가 중심을 향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양 팔을 펴고 두 발을 모으고 있는 사람의 형태는 ┼형이며, AD1세기의 비트루비우스가 그렸고 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사한 인체도는 사지를 벌려 ╳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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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ven and the ­Earth

뿐만 아니라 십자형은 신들의 세계인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상징적 의미도 있다. 수평과 수직의 만남을 초월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의 연결로 간주해 ’세계의 축’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만(卍)자 기호를 보자. 전자는 지상의 수난과 천상의 영광을, 후자는 천지 연결을 뜻하는 우주적 상징으로, 둘 다 심리적 치유와 종교적 구원을 암시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신의 거처인 성당을 건축할 때 십자형 도면과 십자형 교차궁륭이 기본이고, 힌두교, 불교의 만다라에서는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십자형을 기본골격으로 삼되 이를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우주질서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상반구와 하반구, 그리고 좌반구와 우반구, 네 개의 영역을 나누는 십자형 구조를 토대로 사고와 감각, 직관과 감정으로 구분해서 인간의 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교 주역과 불교에서는 수평-수직의 네 방위를 물, 흙, 불, 바람의 네 가지 원소로 상징하여 우주적 질서를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잘 알고 있듯이 한글 모음도 수평선, 수직선을 이용하여 땅은 ᅳ로, 하늘은 ㅣ로 그리고 인간은 가운데 점으로 상징해서 구성된 체계이다.

미술에서도 수평과 수직의 형태는 자주 등장한다. 원시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장식미술에서든 순수미술에서든, 수평선과 수직선은 보편적으로 우주와 인간을 상징하는 기호로 나타난다. 고대미술과 원시공예품을 살펴보면, 수평-수직선, 십자형, 격자무늬가 벽화, 도자기화, 섬유직조, 바구니엮기 등에서 빈번하게 발견이 된다. 이는 예술심리학에서 설명하듯이 인간이 광대하고 예측불가능한 세계 내지는 자연에의 불안을 통제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의도에서 파생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W. 보링거의 ’추상과 감정이입’에 관한 이론도 무질서한 자연에 대립한 질서로서 수평, 수직의 구조를 밝힌 바 있다. 일반적으로 추상미술과 관련한 해설들은 세잔이 자연을 견고한 기하학적 질서로 재조직한 태도를 언급하며, 나아가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의 수직, 수평 시스템의 기하추상 그리고 클레의 기호회화를 해명하면서 수평-수직 체계의 맥락을 추상화가들의 세계관 표현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구조주의적 인식방법을 취한 이 같은 논의는 한마디로 인간과 우주의 상징으로 인식된 수직, 수평의 구조가 원시시대부터 현대-이를테면 미니멀 회화의 격자구조나 십자형 셰이프트캔버스에 이르기까지, 미술가들 사이에 보편적으로 유전되어 왔음을 주장하게 한다. 수평선과 수직선이 교차한 십자형은 고도로 축약된 기호이며, 두 선들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인간의 오감과 내면 심리, 정신적 내용까지 함축하므로, 미술가의 추상재능도 더불어 작동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친족관계의 기본단위"에서, 소쉬르의 공시축-통시축 즉 수평-수직의 교차하는 두 축을 토대로, 내적으로 의존관계를 맺는 이원대립의 기본구조 dichotomie가 여러 문화, 예술영역에서도 공통으로 유효한 작동인임을 가리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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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Yoursel­f

이 글에서 조명하려는 김수자는 화가이면서도 캔버스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인간을 비롯한 세계를 수평-수직 구조란 보편적 질서로 상정하고 이를 형이상학적 사유와 연동시켜 표현하는 작가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자의 작품은 세계에 대한 흥미로운 은유이고, 연작들은 수평-수직 구조에 대한 환유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수평, 수직의 기본구조에 대한 사유는 그의 천을 꿰매는 바느질 작업-"꿰매기 연작"-에서부터 출발하여 이후 "연역적 오브제" 연작을 거쳐 "바늘여인" 연작 그리고 최근의 "지수화풍 地水火風" 연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작업논리 내지는 제작원형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는 수차례 인터뷰에서 특히 자신의 석사논문(<조형기호의 보편성과 유전성에 관한 고찰, 십자형 기호를 중심으로> 1984)에서 수평, 수직의 이원적 구조가 동양의 음양론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포괄하고 구성하는 근본체계임을 설명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캔버스 화면에서 천 작업으로 이동하는지 그리고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두 선의 연결인 십자형이 작가의 작품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어 나타나는지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사유의 이동 I : 캔버스에서 천으로

김수자에게 있어 표현의 도구는 더 이상 캔버스와 물감 그리고 붓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캔버스의 평평한 면과 사각 틀은 구상, 추상을 불문한 재현의 도구일 뿐이고 너무 딱딱한 장치여서, 자유로운 사유의 흐름을 대신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가 않다. 그래서 작가는 캔버스의 구성요소들 중 하나인 유연한 소재, 천을 선택했다. 최초의 천작업인 "꿰매기" 연작(1983-1988)은 각양각색의 천 조각들을 바느질로 연결하여 부정형의 외현을 갖는 작품들을 등장시켰다. 이들을 굳이 회화라고 부른다면, 색면추상이라고 할까? 하지만 1970년대 미국의 하드에지나 컬러필드 회화와는 정반대로, 여기서는 균질의 평평한 색면이나 자른 듯 선명한 윤곽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드로잉 흔적으로 얼룩진 크고 작은 헝겊조각들이 다소 울퉁불퉁한 표면을 보이며 연결되어 있고, 테두리는 불규칙하며 너덜대는 실밥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붙어있다. 완성을 향한 작가의 의지보다는 재료인 천의 고유한 물질성이 전면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다다이스트 같은 반미학적 오브제 선택이라든가 혹은 포괄적인 개념미술의 성향이라고 분류하지는 않겠다. 그가 고른 천과 바느질은 세계의 근본적 구조를 관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처럼 얽히고 설킨 인간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선별된 소재들이다. 사각형으로 자른 천들을 수평과 수직 방향으로 잇대어 놓고 바느질로 연결하여 서로를 기대고 부축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주목되는 것은 캔버스의 딱딱한 나무틀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꿰매어진’ 천들은 밑으로 늘어지지 않고 수평-수직 구조를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천을 잡아당기는 팽팽한 긴장감의 근원은 나무틀을 대신한 관계의 장치 즉 ’바느질의 무수한 땀들’이다. 이들이 조각천과 중력 사이의 균형을 이루게 하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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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ductive Objects

여기서 필자는 작품의 질서를 형성하는 원천인 긴장된 바느질과 유연한 천의 이원적 구조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바느질한 천 작업의 발생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된다. 작가가 여러 차례 말했듯이, 1983년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시침하면서, 불현듯 깨닫게 된 작업방식이다. 이 일화는 그 동안 여러 글들을 통해 잘 알려진 내용이긴 하지만, 작가의 고유한 작품세계의 출발을 알리는 단초가 되므로 다시 인용한다 : “어머니와 함께 이불을 꿰매는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나의 사고와 감수성과 행위가 모두 일치하는 은밀하고도 놀라운 일체감을 체험했으며, 묻어두었던 그 숱한 기억들과 아픔, 삶의 애정까지도 그 안에 내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이 갖는 기본구조로서의 날실과 씨실, 우리 천의 원초적인 색감, 평면을 넘나들며 꿰매는 행위의 천과의 자기동일성,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향수 ... 이 모든 것들에 나 자신은 완전 매료되었다” (<작가노트>, 현대화랑, 1988). 훗날 작가는 이 경험을 다시 회상하며, 천에 뾰족한 바늘을 꽂는 순간 갑자기 온 몸을 관통하는 우주의 에너지를 느꼈다고 말한다. 이 우연한 경험의 놀라운 일화는 이후 그가 인터뷰할 때마다 반복되는 내용으로서, 그의 작업의 원형이 무엇인지 새삼 환기시켜주는 단서가 된다.

작가가 방바닥에 펼쳐진 이불보 천위에 ’뾰족한 바늘을 꽂는 순간’을 필자는 수 백 년 동안 지속된 회화의 평면 스크린을 꿰뚫는 획기적인 순간이라고 바꾸어 해석하고 싶다. 일찍이 단색만 칠한 캔버스를 예리한 칼로 찢고 구멍을 내었던 공간주의 화가 루치오 폰타나처럼, 그도 이불보 표면을 바늘로 넘나들어 구멍을 내면서, 회화를 더 이상 일루전의 스크린이 아닌 입체 구조물의 존재로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수직의 바늘이 수평으로 펼쳐진 이불보의 천을 관통해 나가는 장면이다. 이 3차원의 수평과 수직의 관계는 평면 일루전에만 익숙했던 작가에게 회화의 실체 즉 은폐됐던 캔버스의 구조를 확인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생각된다. 그 동안 회화는 불투명한 스크린 위에 그려진 물감의 막, 그 환영들의 관념적인 재현 내용으로 정의되곤 했었다. 하지만 환영 아래에 감춰져 있던 회화의 기표들 즉 색물감, 캔버스의 천, 그리고 나무틀 같이 화면을 지지하던 구조요소들이 곧 회화의 의미를 결정한다는 사고 전환을 이룬다면, ’회화 = 사각형의 평평한 화면’이란 모더니스트 공식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캔버스나 이불보를 확대해보면, 틈새가 있는 날실과 씨실로 직조된 구조물임이 드러나서, 이들도 실상 상호 교차하는 두 실들로 이뤄진 수평-수직 체계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후일 그가 이불보들을 전시장 공간에 매달아 천의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볼 수 있도록 한 설치법 역시 천의 입체적 구조와 공간적 위상을 증명한 이벤트였다고 생각된다.

사유의 이동 II : 바느질에서 연역적 오브제로 그리고 보따리로

바느질로 완성되는 "꿰매기" 연작 작품들은 어느 경우이든 바느질로 연결된 수평-수직의 이음새들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땅>(1984)이 대표적 예로, 상이한 크기의 사각형 헝겊들이 바느질에 의해 수평-수직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외형의 윤곽마저도 수평선과 수직선이 만나는 십자형을 이루고 있다. 인류문화사에서 보편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수평-수직의 체계가 여기서도 우주구성의 기호로서 그리고 제작의 원형으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의 작품들, <대지>, <너의 초상>, <벽>에서도 변형된 십자형 기호를 거듭 마주칠 수 있으며, 음양을 상징한 수평-수직의 이원구성임을 발견하게 된다.

1989년 즈음하여 "연역적 오브제"가 등장한다. 이 두 번째 연작은 평면 작업에서 입체 작업으로 옮아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오래된 골동 집기나 일상 물품을 천으로 감싸거나 덮는 이 작업은 딱딱한 골격의 오브제에 부드럽고 유연한 천이 덧붙여진 상황이다. 앞서 천에 긴장된 힘을 주던 바느질 작업이 차츰 형태를 완성해내는 귀납법식 제작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처음부터 수평-수직 형태의 골격을 이룬 오브제가 주어지고 그 위에 천을 감싸서 본래 주어진 모양을 드러내는 연역법의 제작인 것이다. 제작 동기는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듯이, 오랜 기억을 되살리는 기물들인 지게, 창호지문틀, 얼레와 북, 빨래걸이, 사다리 등에 내재된 단순명료한 구조미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상적 사물들은 아닌게 아니라 가만히 들여다보면, 뜻 밖에도 수평-수직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지게의 연역적 오브제나 사각형 문틀 그리고 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이등변 사각형의 사다리 등 그 단순한 기하학적 구조미는 ’바느질’ 연작에서 볼 수 있던 수평-수직의 모자이크식 구조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평면구조에서 입체구조로 바뀌고 재료가 달라서 이질적이랄 수 있겠지만, 구조의 체제는 등가여서, 마치 xy축의 평면기하학에서 공간의 깊이를 더한 xyz축의 입체기하학으로 사유의 이동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체조선수들이 사용하는 커다란 원형 강철 테에 천을 입힌 작품(<무제> 1991)은 수평-수직 구조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공간을 가로질러 굴러갈 수 있는 이 둥근 입체 오브제를 풀어 평면으로 되돌린다고 상상할 경우, 좁고 긴 사다리 모양의 수평-수직 구조가 금방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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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aris

딱딱한 오브제가 캔버스의 나무틀 -support 역할을 하며, 팽팽하게 둘러싼 천이 화면의 천-surface이라고 상정해본다면, 이 역시도 캔버스의 구조적 해체에 대한 또 다른 번안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이 같은 작업을 1970년을 전후하여 프랑스에서 전개된 분석적 실험회화운동인 쉬포르/쉬르파스 Supports/Surfaces 와 비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회화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출발한 쉬포르/쉬르파스 작가들은 구조주의 인식론을 토대로 회화의 우월했던 관념과 단절하기 위해 캔버스 구조 자체를 드러내고, 각자 천/나무를 의미를 만드는 기표로 간주하여 다양한 이원대립쌍의 오브제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이들의 의미심장한 작업을 작가가 알거나 참조했는지 지금 확인할 수 없으나, 객관적으로 상호 관련성을 밝혀내는 비평적 논의는 앞으로 또 다른 기회에 시도해 볼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입체 구조물로 이룩된 "연역적 오브제" 연작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이 특정 장소에 놓여짐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는 장소특수성을 지닌다는 점에 있다. 가령 전시장 벽면이나 바닥에 설치된 헝겊들의 축적은 바로 해당 전시장 공간의 그 특정 장소를 덮음으로서 작품의 의미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딱딱한 벽면과 바닥이 여기서도 부드러운 천과 이원적 대응 구조를 이루며 수평-수직의 제작 원형을 따른다는 사실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후 경주 옥산서원 계곡에서 이루어진 <자연에 눕다>는 자연의 바위들과 색동 천들이, 비엔날레의 카페테리아나 식당에서 테이블보로 사용된 "연역적 오브제"는 식탁과 이불보가, 각각 전시장을 떠나 자연과 도시의 특정 장소에서 주어진 골격 위에 천을 덮는 수평-수직의 체제를 실현한 경우가 된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흥미로운 "연역적 오브제"의 예는 <만남, 바느질하여 바라보기>(1998-2002)이다. 여기서 수직으로 직립한 작가 자신의 몸은 뾰족한 바늘에 다름 아니고 그 머리 위에 겹겹이 덮인 색동 천들은 바늘이 이제 막 만나자 마자 뚫고 지나갈 바로 그 이불천들이다. 색동천들을 두른 새색시의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모습을 관찰하며 보편적인 페미니즘 관점에서 한국 여인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일은 다른 지면에서 시도될 문제이다. 여기서는 페미니즘을 비켜서 보다 근본적인 수직과 수평의 구조적 제작원형을 추론하는 일이 앞선 해석의 과제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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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ttaris and artist­

뉴욕 PS1 창작스튜디오의 작업실에서 태동된 "보따리" 연작은 "연역적 오브제"에 이어 작가의 사유가 평면에서 입체, 입체에서 장소 그리고 다시 다른 공간으로 이동되는 사례라고 판단된다. 보자기와 내용물로 구성된 보따리는 지난 세대의 평범한 일상사물로, 그에 얽힌 한민족의 유랑기원과 서민들의 이삿짐 풍습 그리고 작가개인의 어린 시절 유랑기억이 기술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작가가 매번 보따리를 싸면서 고려했을 입체적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우선 사각형 보자기의 모퉁이를 손으로 거두어 잡아 싸는 행위 즉 매는 행위로부터 상기해보자. 평면의 보자기는 4개 모서리 끝의 천을 잡아 올려 중앙에 놓인 짐 위로 잔뜩 잡아당긴 다음 그 짐의 정중앙 위에서 서로 엇갈려 맬 때, 비로소 입체의 보따리로 탄생한다. 여기서 매듭은 네 손잡이 천들이 정확히 직교해야만 균형을 이루며, 보따리도 제대로 된 모습을 갖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보따리는 매듭의 균형을 잃고 일그러져 속에 든 내용물을 마치 내장을 드러내 듯 흉한 모양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역시 보자기가 보따리로 변신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은 그 네 모서리 천이 한 쌍식 수직과 수평의 십자형 교차를 이룰 때이다.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보자기를 매어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쌌다가도 풀러 다시 매기를 여러 번 하면서 수평-수직의 매듭구조가 균형을 잘 잡았는지 그래서 보따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지면에서 평형을 이루며 앉았는지 눈으로 거듭 확인해보게 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그 보따리를 단숨에 들어 올리고 걸음을 내딛으며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보따리" 연작에서부터 김수자의 국제작가로서의 명성이 확립됐다고 볼 수 있는 만큼, 이 연작이 갖는 의미는 크다. 캔버스의 사각형 평면구조가 가변성 있는 형태의 입체구조로 되었고, 이미지가 고정적으로 현시되던 화면 상태에서 보자기의 풀기/매기에 따라 현시/은폐, 열림/닫힘을 반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따리 틈새로 보이는 천들에 의해 현시/은폐가 공존하기도 하는 그런 임의성을 지닌 구조물로 전환되어 있다. 다른 한편, 늘어진 천들을 팽팽히 싸매어 긴장시키는 보자기의 힘은 역시 화포를 잡아당기던 나무틀이나 이불보에 장력을 주던 바느질, 각양각색 천들에 형태를 부여하던 오브제의 또 다른 대응물에 다름 아니다. 매번 달라진 장소에 놓이는 보따리는 수평의 지평을 따라 이동하는 수직의 구조물이자, 해당 장소에서 그 화려한 동양적 색감과 독특한 민속적 존재감으로 감상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의 관계맺기를 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수평과 수직의 시공간

흐르는 삼라만상과 마음이 머무는 자리

김수자는 1997년의 작품 <떠도는 도시들-보따리트럭 2727km> 이후 "바늘여인" 연작과 "빨래하는 여인" 연작을 연달아 발표한다. 이는 보따리트럭 위의 자신이 국도나 산간도로를 타고 이동하며 상이한 지역을 엮어낸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바늘(수직축)이 되어 세계의 도시와 인파의 층(수평축)을 거듭 관통하며 시공간을 넘어 기억과 체험을 하나로 연결한 작업이다. 작가는 항상 긴 머리를 질끈 동여맨 뒷모습으로 등장하며, 정지해 서있는 그의 주변을 다양한 골격과 피부색의 인파가 물결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보인다. 그런데 막상 작품 비디오나 사진을 보면, 작가가 세계 곳곳의 도시인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지 혹은 사람들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지 확실히 분별되지 않는다. 흐르는 물길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물이 흐르는지 내가 흐르는지 혼돈되는 것과도 같다. 이런 의식의 헷갈림은 주체인 내가 움직이든 타자가 움직이든 궁극으로는 흐르는 이치는 동일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한다. 인간 지각의 불확실함 너머로 불교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만물은 흐르고 변화할 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음과 화엄경의 유심설(唯心說)에서 말하는 흐르는 외부세계의 주체는 바로 나의 마음자리란 사실을 떠오르게 한다. 바늘여인은 그렇게 가만히 서서 사람들의 물결 혹은 화장한 시신의 부유물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생멸변화하는 우주와 찰나로 바뀌는 마음자리를 표상하는 기호 역할을 하는 듯하다. 또한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만들어낸 지평(바위산 혹은 도로면)에 몸을 모로 누이고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길게 뻗고 있는 작가의 모습도 있다. 이 경우 바늘여인은 평평한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이지만 주변의 치솟은 산과 나무나 건물들 혹은 서서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직교하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수평으로 누어있고 수직으로 서있는지는 상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면, 그 세상이 도리어 뒤집힌 모습으로 지각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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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eedle Woman

가장 최근 작품인 <지수화풍> 연작은 전시 장소에 따라 설치된 7개 8개의 대형 프로젝터를 통해 자연의 변화무쌍한 풍경들을 펼쳐 보인다. 작가가 스페인의 란자로테산과 콰테말라의 파카야화산에서 촬영한 용암 분출과 응고, 바다의 출렁이는 파도와 물안개, 하늘의 구름과 바람, 대지의 움직임과 모래 그리고 그린랜드에서 촬영한 빙하의 동영상들은 감상자를 원시적 자연의 엄청난 힘과 맞닥뜨리게 한다. 물론 작가는 어디에도 비추어지지 않지만,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담은 작가의 시야가 곧 스크린에 투영되어 있으므로, 존재와 부재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방 벽에 비추어진 동영상에는 수지화풍의 장면들이 흘러가며 전시장 가운데 서있는 감상자는 마치 자신이 세상의 수직축이고 사방으로 자연의 삼라만상이 연이어 흘러간다고 여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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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s Air of Fire

불교에서 인간존재를 가리킬 때 5온(蘊)이란 말을 하는데, 이는 물질적 요소인 색(色)과 정신적 요소인 수(受).상(想).행(行).식(識)의 5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비가시적인 정신적 요소들로 축약되어 부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실상 육체(색)의 물질적인 4가지 기본 요소들이 지수화풍이므로 자연의 지수화풍 풍경들을 통해 작가를 비롯한 인간 존재가 은유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인간 육신은 고대 그리스 유물론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흙, 물, 불, 공기의 4원소로 구성된 채 탄생했다가 다시 그들 4원소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지수화풍>의 자연의 모습들은 곧 인간으로 생성되기 전의 본래 모습이며 또 장차 소멸의 순환고리에 따라 돌아갈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수화풍> 연작은 작가의 2010년 2월 인터뷰에서 한 언급처럼 "자연과 인간은 하나라는 일체성을 근간으로 한 질문들을 담고" 있는 명상적 작품이다. 그리고 흙이 물이 되고 물이 불이 되며 불이 공기가 되는 이 수평으로 돌고 도는 지수화풍, 4 원소의 순환고리에 생명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우연의 스파크는 바로 수직의 마음(정신 혹은 영)이 바늘처럼 꽂혀 교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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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rth-Water-Fire-Air 2012